소리가 나자 바늘 끝이 접힌 종이에서 빗나갔다. 태준은 손가락을 찔렀나 보았다. 피는 나지 않았다. 맞은편의 천량도 손을 멈추고 있었다. 바닥에 세워 둔 판이 떨리다가 벽에 가볍게 부딪쳤다.
태준은 문으로 갔다. 골목에서 사람들이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지붕들 너머로 붉은 기운이 번졌다.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짧은 총성이 여러 번 이어졌다.
천량이 그의 어깨를 당겼다.
“문 안으로 들어와.”
“어디예요?”
“나도 몰라.”
천량은 밖에 있던 사람에게 중국말로 물었다. 일본 군인과 중국 군인이 싸우기 시작했다는 말이라고 천량이 옮겼다. 어디까지 길이 열려 있는지는 그 사람도 모른다고 했다.
태준은 작업대로 돌아와 바늘을 뽑았다. 실을 다시 꿰려고 했으나 바늘귀가 자꾸 손가락 뒤로 숨었다. 천량이 작업등의 불을 줄였다.
“오늘은 그만해.”
태준은 실을 짧게 잘라 책 사이에 끼웠다. 내일이면 다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속지 열두 벌을 선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밤중에 천량이 집에 다녀왔다. 아내와 아이를 남쪽 친척에게 보내기로 했다고 했다. 태준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지만 천량은 밖이 밝아져야 움직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옷을 입은 채 번갈아 누웠다.
이튿날 아침, 천량이 가족을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때 태성이 와 있었다. 이정헌의 아들로 중국어 문서를 옮기고 교정을 보던 태성은 작업대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남쪽 방에 계세요. 오늘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는 교정쇄를 찾았다. 태준은 교정쇄 위에 다른 종이들을 놓았다. 원식에게 보낸 편지의 초안과 만복이 붙잡힌 날을 적어 둔 쪽지, 우씨 종이점에서 돌려받은 납품표였다.
태성은 종이마다 첫 줄을 읽다가 바깥 소리에 말을 멈췄다.
“이건 누구한테서 들으신 겁니까?”
“그 방에 제가 있었어요.”
태준은 수사자가 펼친 종이의 모양을 다시 그렸다. 자기 이름 아래 정헌의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는 손에 가려 읽지 못했다. 한경애와 우씨는 통역이 입으로 말한 이름이었다. 종이에 모두 적혀 있었다고 써 놓은 줄은 지웠다.
태성이 펜을 내밀었다.
“본 이름하고 들은 이름을 여기서 갈라 주시겠어요.”
부었던 자리는 가라앉았으나 엄지 밑을 오래 누르면 아직 당겼다.
“만복이는요?”
태성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옮겼는지도 못 알아냈어요. 어제는 어떤 사람이 만복이가 이름을 댄 것 아니냐고 묻더군요.”
태준의 펜이 멎었다.
“그 애가 잡히기도 전에 그 사람들 종이에 우리 이름이 있었어요. 그 순서를 빼지 말아 주세요.”
“그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고요.”
“예. 그건 모릅니다.”
태성은 그 말을 적었다. 태준은 만복이 신의 뒤축을 밟고 계단을 내려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애가 영영 그렇게만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디에서 버티고 있을 거라고 덧붙일 수도 없었다.
태준은 만복의 이름 옆에 '소재 미확인'이라고 썼다.
“그 종이를 나른 건 맞아요. 일본 통치를 거부한다는 글도 실려 있었고요. 그런 글을 읽고 돌렸다고 사람을 때려서 데려가는 걸 그냥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걸 바로 찍자는 말씀은 아니지요?”
“아니에요. 가족한테 다른 말이 가면 안 되니까.”
천량이 식은 차를 가져왔다. 지금은 누군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조태섭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태준도 아직 알지 못했다. 태섭과 나눈 말은 수사자가 한 말과 따로 적었다.
천량은 중국말로 우씨가 연락용 짐 보관은 거절하되 종이 거래는 계속하겠다고 한 일을 적었다. 태성이 읽고 되물었다.
태준은 직접 본 일을 적은 종이와 전언을 적은 종이를 나누어 태성에게 넘겼다. 태성은 두 묶음을 가방 안쪽에 넣고 덮개를 잠갔다.
“같이 가시죠.”
태준은 천량을 보았다.
제본소 주인이 구해 보겠다던 수레가 아직 오지 않았다. 태준은 태성과 먼저 가겠다는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해 보았다.
“천량 씨하고 같이 나갈게요.”
천량이 그를 보았다.
“먼저 가도 돼.”
“아까 기록은 내가 가져가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넘겼으니까, 이건 같이 하죠.”
태준이 보퉁이를 끌어내자 천량이 매듭을 풀고 무거운 판 두 개를 꺼냈다.
“그럼 이것부터 놓고 가.”
“옷이 눌릴까 봐 넣은 건데요.”
“네 옷은 펴 입으면 되잖아.”
태성이 짧게 웃었다. 태준도 판을 벽에 기대 놓았다. 떠나는 태성에게 정헌께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천량의 가족이 있는 남쪽 친척집으로 가려 한다고, 도착하면 다시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수레는 끝내 오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둘은 짐을 들고 나갔으나 큰길에 몰린 사람들 사이에서 한참 서 있다가 돌아왔다. 앞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달려오던 사람들이 뒤의 사람들을 밀었다. 천량은 그 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은 천량이 혼자 돌아와 가족은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친척집까지 가 보았느냐고 묻자 천량은 고개를 끄덕이고 신을 벗었다. 발가락 사이의 살이 벗겨져 있었다. 태준은 더 묻지 않고 물을 가져왔다.
이월 이일 밤에는 제본소 가까운 곳에도 불이 보였다. 장부와 책을 높은 선반으로 옮기다가 천량이 묶지 않은 독본을 가져갈 것이냐고 물었다.
태준은 한 벌을 펴 보았다. 바늘을 집으면 얼마 동안은 바깥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책을 덮었다.
“두고 가요.”
태준은 송곳과 바늘, 작은 가위를 천에 말았다. 도구 몇 개는 천량의 보퉁이에, 돈주머니와 편지들을 싼 작은 보퉁이는 자기 코트 안에 넣었다. 경성에서 온 편지와 아직 부치지 못한 자기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월 삼일 아침, 천량은 뒤쪽 거주 구역을 지나가자고 했다. 어제 그쪽으로 빠져나간 사람이 돌아와 길이 열려 있다고 알려 주었다는 것이었다. 태준은 그 사람이 지나간 시각을 물었다. 천량은 해 지기 전이라고 했다.
밖에는 타 버린 짚 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태준은 새 신을 신고 나왔으나, 걷는 동안 자꾸 뒤꿈치를 생각했다.
길이 넓어지는 곳에서 사람들이 멎었다. 짐수레가 비스듬히 서 있고, 무명천 한 필이 바퀴에 감겨 있었다. 중국말을 하는 사내가 막대기를 가로로 들고 사람들을 뒤로 밀었다.
길 건너 일본 군복을 입은 병사 하나가 일본말로 외치자 사내가 같은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천량이 태준의 보퉁이를 잡아당겼다.
“앞으로 오면 쏜다고 해. 이쪽도 막았어.”
수레 옆의 노인이 무명천을 걷으려 몸을 숙였다. 막대기를 든 사내가 노인의 어깨를 밀었다. 총성이 났다. 수레 뒤의 벽에서 흰 가루가 튀었다. 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태준의 갈비뼈에 보퉁이 모서리가 박혔다. 천량은 몇 걸음 옆에서 손을 들고 있었다. 태준이 그 손을 붙잡자 천량은 골목 안쪽으로 끌었다.
“아까 그 길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거기도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어.”
태준은 뒤를 보았다. 조금 전 지나온 곳에서 짐을 이고 오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는 천량을 따라 담에 붙어 걸었다.
낮은 문 앞에서 중국인 사내 하나가 물동이를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천량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사내는 동이를 내려놓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천량의 말이 길어질수록 사내의 눈이 두 사람 뒤쪽을 살폈다.
“뭐래요?”
“자기 애들 두고는 못 간대. 군인한테 누구 숨겨 주면 집안사람까지 끌고 가겠다는 말을 들었대.”
사내가 천량의 팔을 밀어 문밖으로 물러서게 했다. 태준은 문을 가로막던 자기 짐을 당겼다. 천량도 한 발 비켰다.
태준은 길을 알려 달라는 손짓을 했다. 천량이 짧게 설명하자 사내는 물동이를 안에 내려놓고 다시 나왔다.
천량이 골목 끝까지 함께 가 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을 태준은 '함께'라는 말과 손짓으로 알아들었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태준은 천량에게 이제 가자고 했다. 남의 집 앞에 서 있으면 자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겼다. 계속 조를 수는 없었다.
그때 사내가 문 안에서 낡은 솜이불을 들고 나왔다. 한 귀퉁이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어서 두 사람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사내는 이불을 천량에게 밀어 주고, 안마당에서 반대편 골목으로 난 문을 가리켰다.
마당에는 물에 젖은 신발 세 켤레가 놓여 있었다. 어린아이의 것이 하나였다. 방문 틈으로 여자가 두 사람을 보고 있었고,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문을 조금 닫았다. 사내는 뒤쪽 문을 열어 주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저기로 돌면 큰길 하나를 피한대. 이불은 그냥 가지고 가래.”
태준은 자기 팔을 펴 이불을 받았다. 사내가 이불 끝을 당겨 짧게 접어 주었다.
“고맙다고 해 주세요.”
천량이 말을 옮겼다. 태준은 그의 이름을 묻지 못하고 골목으로 나왔다.
반대편 골목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어려웠다. 벽 아래에 깨진 기왓장이 쌓였고, 위층에서 내려온 줄에 젖은 천이 걸려 있었다. 태준은 천량을 따라갔다. 안쪽 보퉁이가 내려오지 않도록 코트 깃을 여몄다.
멀리서 무거운 소리가 울렸다. 천량이 돌아보았다. 그때 발바닥으로 진동이 왔다. 머리 위에서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태준은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왼쪽 어깨에 무언가 부딪치고, 몸이 옆으로 꺾였다. 이불이 팔에서 빠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다리가 따라오지 않았다. 허리 아래로 무거운 것이 내려앉았다.
먼지가 입 안에 들어왔다. 기침할 때마다 배 속에서 단단한 것을 비트는 듯했다. 눈을 뜨니 바로 앞에 붉은 벽돌의 옆면이 있었다.
“천량 씨.”
그는 팔꿈치를 굽혔다. 상반신은 조금 움직였다. 다리를 당기려 하자 골반 안쪽에서 통증이 솟았다. 태준은 이를 물고 멈췄다.
천량이 그의 앞에 엎드렸다. 눈썹 위에서 피가 흘러 한쪽 눈을 적시고 있었다. 천량이 중국말로 소리치고, 태준에게는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다리가 안 나와요.”
“알아. 잠깐만.”
태준은 벽돌을 밀었다. 천량이 그의 손을 잡아 바닥에 놓았다. 손을 놓고 있으면 더 깊이 눌리는 것 같아 태준은 다시 틈을 더듬었다.
골목 입구에서 아까 문을 열어 주었던 사내가 뛰어왔다. 그는 무너진 곳을 보고 잠깐 멎더니 천량 곁에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았다.
사내와 천량이 함께 무거운 것을 들어 올렸다. 태준은 오른쪽 무릎을 당겼다. 신발이 잔해를 긁는 소리가 났다. 왼쪽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만 더요.”
천량의 턱에서 땀이 떨어졌다. 두 사람은 손을 바꾸어 잡고 다시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무언가 미끄러져 태준의 몸을 더 세게 눌렀다. 그는 입을 벌린 채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만, 잠깐.”
자기가 한 말인지 천량이 한 말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태준은 바닥을 움켜쥐었다. 아픈 곳을 피해서 몸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사내가 길게 소리쳤다. 태준의 눈앞에 낡은 가죽신 두 켤레가 멎었다. 누군가 기다란 쇠를 잔해 밑으로 밀어 넣었다. 천량은 태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가 이불을 펴라고 말했다.
“내가 팔로 밀게요.”
태준은 팔꿈치를 세웠다.
“내가 할 수 있어요.”
천량이 대답했다. 무엇이라고 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입의 움직임은 보였다. 쇠를 잡은 사람들이 힘을 주자 눌렸던 곳에 틈이 생겼다.
천량과 사내가 양쪽에서 이불을 잡아당겼다. 태준의 허리가 턱을 넘어가자 왼쪽 다리도 잔해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이불 아래의 기왓장이 등을 긁었다. 천량이 그의 어깨를 받쳤다. 사내는 태준의 바지 위에 두 손을 대고 누르다가 안쪽을 보려고 옷을 들췄다.
태준도 고개를 들었다. 자기 바지 한쪽이 젖어 있었다. 천량이 코트를 벗어 접더니 그 위를 눌렀다. 태준은 손을 보태려 했으나 팔을 올리는 동안 숨이 막혔다.
“병원으로 가요.”
천량은 태준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응. 옮길 거야.”
“여기 두지 말고.”
“들었어.”
사내가 누군가에게 소리쳐 무엇을 가져오게 했다. 태준은 눈을 감았다가 얼른 떴다. 사람들이 다른 데로 갈 것 같았다. 천량의 소매를 잡으려다 손목의 맨살을 잡았다.
“죽고 싶지 않아요. 나 좀 데리고 가요.”
천량이 그의 손을 자기 팔에서 떼어 가슴 위에 올려 주었다.
“네 손 놓은 거 아니야. 이거 잡아.”
천량의 손가락이 태준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태준은 그것을 쥐었다.
길에서 가져온 널판이 이불 곁에 놓였다. 몸을 옮길 때 태준은 한쪽으로 돌아누우려 했다. 배가 덜 아플 것 같았다. 그러나 허리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하얘졌다. 그는 바로 눕겠다고 말했다.
널판이 들렸다. 태준은 골목 위로 잘린 하늘을 보았다. 누군가 발을 헛디뎌 널판이 기울었고, 태준은 손잡을 곳을 찾았다. 천량의 손이 다시 와 닿았다.
마당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통과했던 집인 듯했다. 거절했던 사람에게 다시 짐이 되었다는 생각이 났다가, 지금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으면 했다.
천량이 태준의 코트에서 보퉁이를 꺼냈다. 태준이 손을 움직이자 얼굴 옆에 놓아 주었다.
“여기 있어.”
태준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연화에게 쓴 편지에는 같이 장에 가서 먹을 것을 고르겠다는 말이 있었다. 그것을 아직 보내지 못했다. 부치러 갈 때는 지난번처럼 주소를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이 떨리면 천량에게 잠깐 대신 써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흙이 묻은 자기 손과 천량의 손이 겹쳐 있었다. 씻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경성에서 돌아가 누울 방을 떠올리려 했다. 정확한 방의 모양보다 연화가 가까이 왔을 때 옷에서 나던 냄새가 먼저 생각났다. 비누와 주방의 연기 냄새였다. 그때는 아침에 떠나야 해서 잠드는 것이 아까웠다. 이번에 만나면 잠을 자고, 눈을 뜬 뒤에도 급히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태준은 천량에게 몸을 조금만 옆으로 돌려 달라고 하려 했다. 첫 낱말을 말하자 숨이 모자랐다. 천량이 귀를 가까이 댔다. 가슴 위에 얹힌 손이 무거워 자기 손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멀리서 다시 소리가 났다. 마당에 있던 발들이 움직였으나 천량의 손은 그대로였다. 태준은 손가락을 굽혔다. 조금만 숨을 고르면 다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더 숨을 들이쉬려 했으나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을 받치던 손가락의 감촉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