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끝을 자르자 속에 가느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연화는 칼끝으로 그 둘레를 도려냈다. 겉으로 보아서는 멀쩡해서 골라 온 것이었다. 자른 것을 뒤집어 보는데 부엌 문밖에서 박원식이 이름을 불렀다.
연화는 칼을 든 채 고개를 돌렸다. 태준의 경성 제본소 선배이자 중국 쪽 연락을 맡아 온 원식은 문턱을 넘지 않고 서 있었다. 두루마기 아래로 바지 한쪽이 무릎까지 젖어 있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원식은 대답하기 전에 부엌 안을 보았다. 원식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잠깐 앉을 수 있겠습니까.”
“태준이한테서 뭐 왔어요?”
“그 일로 왔습니다.”
연화는 칼을 내려놓았다. 원식이 문밖으로 비켜 주자 연화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마당으로 나갔다.
복임은 처마 밑에서 손님에게 돌려줄 돈을 세고 있었다. 연화가 원식과 제 방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복임은 저녁 쌀을 씻어 놓았느냐고 물었다.
“아직요. 다녀와서 할게요.”
원식은 문 쪽에 무릎을 붙이고 앉았다. 봉투를 꺼내 놓은 뒤에도 손을 떼지 않았다.
“태준이가 다쳤어요?”
“죽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봉투 한쪽이 여러 번 접혀 희게 일어나 있었다. 자기 앞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받는 사람의 이름은 박원식이었다.
“누가요?”
“태준이가요.”
밖에서 양동이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연화는 그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원식이 뒤의 말을 하지 않아서 다시 얼굴을 들었다.
“누가 그렇게 썼어요?”
“같이 일하던 천량이라는 사람이요. 태준이 편지에서 보셨을 겁니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량의 이름은 알았다. 태준은 그 사람이 조선말로 자기를 꾸짖는 것이 중국말로 꾸짖는 것보다 무섭다고 쓴 적이 있었다. 연화는 그 이름을 보며 웃었던 편지를 어디 두었는지 생각했다.
원식이 봉투에서 종이들을 꺼냈다. 그는 조선말로 쓴 것을 연화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건 이태성 씨가 옮겼습니다. 이정헌 선생의 아들입니다. 천량이 그 사람 앞으로 쓴 것을, 태성이 조선말로 옮겨 저한테 보냈어요.”
천량이 보낸 중국말 편지, 태성이 옮긴 글, 그리고 원식 앞으로 온 짧은 편지가 따로 놓였다. 어느 것부터 보아야 하는지 원식이 손가락으로 짚었다.
윤태준은 이월 삼일 상하이에서 죽었습니다. 그날 나는 태준과 함께 있었습니다. 무너진 건물에 다친 그를 꺼내려 했으나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월 사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의 몸을 묻었습니다.
연화는 다음 줄로 내려가지 못했다. 삼일이라는 글자 밑에 종이의 접힌 금이 지나갔다. 펴 놓았는데도 그 줄만 조금 떠 있었다. 손바닥으로 누르자 다른 쪽 모서리가 올라왔다.
“읽어 드릴까요?”
“읽었어요.”
연화는 종이를 놓지 않았다.
“이월이에요?”
“예.”
“지난달 삼일?”
원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월 삼일에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설을 앞두고 손님이 많았던 날들 가운데 하나였다. 손님에게 무엇을 냈는지, 그날 저녁에 빨래를 했는지 생각할수록 다른 날의 일까지 섞였다.
“이걸 언제 쓴 건데요?”
“여기 적힌 날짜가 이월 십구일입니다. 태성이 저한테 쓴 것은 삼월 오일이고요. 제게는 오늘 아침 닿았습니다.”
“그럼 태성 씨가 본 건 아니네요.”
“예. 그 자리에 없었답니다.”
“원식 씨는요?”
“저는 못 봤습니다. 태준이 떠난 뒤로는 얼굴을 못 봤어요.”
“천량이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태준이를 아는 사람이죠.”
“함께 제본 일을 했습니다.”
“이름만 들은 게 아니고요.”
“예.”
연화는 중국말 편지를 당겨 보았다. 태준에게 부칠 주소를 따라 쓰느라 익숙해진 글자도 있는 듯했으나 문장은 읽을 수 없었다. 조선말로 옮긴 종이를 다시 그 옆에 놓았다.
“이 아래도 읽어 주세요.”
옮긴 글에는 천량이 태준의 얼굴을 알아보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죽음을 적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천량은 자기가 보지 못한 앞뒤의 일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고 썼다. 남겨진 물건은 흩어진 것을 찾는 중이며, 지금 편지와 함께 보내지는 못한다고 했다.
“거기는 어디예요. 묻었다는 데.”
“상하이라는 것 말고는 제가 이 글에서 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태성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 있는 땅을 묻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무릎 아래가 저려 왔다. 원식이 상을 조금 밀어 주었다. 연화는 상이 있던 자리에 발을 놓고 앉았다.
“물을 좀 가져올까요?”
“아니요.”
목이 말랐다. 그래도 원식이 일어나면 종이도 함께 거두어 갈 것 같았다.
“이것들은 여기 두고 가세요.”
“그러려고 가져왔습니다.”
연화는 세 장을 제 쪽으로 당겼다. 원식이 봉투도 내밀었다. 먼 길을 온 물건을 만지면 늘 그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손바닥에 종이의 두께만 느껴졌다.
연화는 벽 쪽의 옷보퉁이를 풀었다. 갈색 표지의 공책이 옷 사이에 끼어 있었다. 책등이 전보다 두꺼워져 끈을 풀어도 저절로 닫히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장에 무엇을 그렸는지 손이 먼저 찾아갔다.
앞쪽에는 솥을 놓고도 사람이 앉을 수 있을지 가늠하던 그림이 있었다. 연화는 그 장을 지나 편지들이 든 곳을 폈다. 접어 끼운 봉투들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지난해 십이월에 온 편지를 골랐다. 처음 읽을 때 음식 냄새가 밸까 봐 손을 다시 씻고 만졌던 종이였다.
이번에 산 신은 처음부터 발뒤꿈치가 아프다. 천량은 길들이면 된다는데 신이 나한테 길드는 건지 내가 신한테 길드는 건지 모르겠다.
연화는 그 문장을 읽고도 웃지 않았다. 그 아래로 눈을 옮겼다.
봄에 가게 되면 네가 보아 둔 집을 같이 보고 싶다. 내가 쓸 자리를 먼저 고르지는 않을 테니 아직 남은 자리가 있는지만 알려 줘.
연화는 종이를 원식에게 보였다.
“여기요.”
원식이 몸을 기울였다.
“봄에 온다고요.”
연화도 다시 읽었다. 봄에 가게 되면. 태준은 날짜를 적지 않았다. 연화는 그때도 날짜가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다음 봄에 쓸 이불을 따로 보아 두었다.
“제가 답장을 했어요.”
연화는 공책 뒤쪽을 넘겼다. 편지를 부친 날을 적은 자리가 있었다. 가게 밑그림 옆으로 정월 스무날이라고 작게 써 두었다.
“스무날에 부쳤으면 받았겠죠?”
원식이 공책의 날짜를 보았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오래 안 걸렸는데.”
“이번 편지에는 그 이야기가 없습니다.”
연화는 옛 편지를 다시 폈다. 태준의 글씨에서 자기 답장을 읽었다는 말을 찾고 있었다. 답장을 부치기 전에 온 편지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종이를 뒤집었다.
답장에는 방을 함께 보자는 말을 썼다. 여관에서 너무 먼 곳은 싫지만, 부엌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곳도 싫다고 했다. 태준이 신을 길들이기 전에 돌아오면 경성 길에서 대신 신어 주겠다고도 썼다. 끝에는 오겠다는 말만 하지 말고 언제 배를 알아볼 것인지 적으라고 했다.
그 끝을 조금 부드럽게 고쳤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부치기 전에 한번 더 읽었어야 했다.
“제가 빨리 오라고 했으면요.”
“좀 더 일찍요. 그 편지보다 전에.”
“연화 씨.”
“아니에요. 그건 제가 몰라요.”
말을 멈추었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방값을 묻던 날, 같이 읽던 책을 끝까지 읽고도 모르는 대목을 편지에 물었던 날. 어느 날에도 자기는 다음 편지를 받을 줄 알았다.
“그때 경찰이 왔었어요.”
“태준이 이름을 적어 갔다고 하셨지요.”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기수가 빈 종이를 내밀던 날이었다. 첫 획을 너무 오래 눌러 윤 자의 한쪽이 번졌다.
“그 종이는 어디로 갔을까요.”
“모릅니다.”
“여기서 적어 간 게 저기까지 갔을까요.”
“그 종이가 상하이까지 갔는지는 모릅니다. 그 뒤에 누가 무엇을 했는지도, 이 편지에는 없습니다.”
연화는 공책의 모서리를 쥐었다.
“저는 썼어요.”
원식이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이름은 제가 썼어요. 주소는 그 사람이 베꼈어도.”
자기가 이름을 써 주었다는 일과 태준이 죽었다는 일이 자꾸 한 줄로 이어졌다.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연화는 몰랐다.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 쓰면 또 온다고 했고요.”
말을 하면서도 변명을 준비한 사람처럼 들릴까 봐 목소리가 작아졌다.
“태준이는 알았을까요.”
“경찰이 다녀갔다고 편지하셨잖습니까.”
“그건 썼어요. 그 편지를 받았다고는 했어요.”
태준은 연화가 적어 보낸 날짜와 질문을 읽었다고 했고, 겉봉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두라고 했다. 이름을 쓴 일을 탓하는 말은 없었다. 연화는 그 편지를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탓하지 않은 것이 괜찮다는 뜻이었는지 이제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몰랐다.
마당에서 정숙의 기침 소리가 났다. 원식이 조용히 물었다.
“한정숙 아주머니를 모실까요?”
연화는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정숙이 빨래 바구니를 끼고 서 있다가 연화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일이니.”
“태준이가 죽었대요.”
정숙의 바구니가 옆으로 기울었다. 젖은 소매 하나가 밖으로 늘어졌다. 정숙은 그것을 도로 넣지 않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들어가자.”
정숙이 연화의 팔을 잡았다. 죽었다는 말을 자기가 한 것이 처음이었다. 연화는 아프다고 말하려다가 그 손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숙은 바로 편지를 집지 않았다. 연화 옆에 앉아 원식이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원식이 태성의 이름을 말하자 그제야 종이를 가까이 당겼다. 정숙은 아들이 옮긴 글의 끝을 오래 보았다.
연화는 정숙이 읽는 동안 공책에서 떨어진 편지들을 주웠다. 어느 봉투에 어느 편지를 넣어야 하는지 두 통이 맞지 않았다.
원식은 태성에게 물어볼 말을 적어 가겠다고 했다. 연화는 처음에 고개를 저었다가 원식이 일어서려 하자 불렀다.
“정월 스무날 부친 편지요. 받았는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원식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스무날이라고 적겠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 주세요.”
연화는 그 말을 하고 바닥을 보았다. 원식은 적던 손을 잠깐 멈춘 뒤 그러겠다고 했다.
문밖까지 따라 나가려는데 정숙이 연화의 무릎 위에 손을 놓았다. 원식도 앉아 계시라고 했다. 연화는 원식의 신발 신는 소리를 방 안에서 들었다.
복임이 찾아온 것은 처마의 볕이 사라진 뒤였다. 복임은 정숙에게서 짧은 설명을 듣고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오늘 일은 내가 할 테니 누워 있어라.”
“쌀도 안 씻었어요.”
“내가 씻는다.”
“손님 수는요.”
“내가 안다.”
연화는 자기도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바닥을 짚었다. 방 밖으로 나오니 발바닥에 차가운 흙이 닿았다. 신을 신지 않았다. 돌아가 신을 찾는 동안 복임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연화도 뒤따라갔다. 무는 도마에 그대로 있었고, 도려낸 조각의 가장자리가 말라 있었다. 칼을 들면 손이 할 일을 알 것 같았다. 늘 하던 대로 무를 당겨 눌렀다.
칼자루가 손바닥에서 조금도 낯설지 않은데, 연화는 다음에 어느 쪽을 잘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도려낸 곳을 또 도려냈다. 무 조각이 손가락 밑에서 굴렀다.
복임이 쌀을 씻다 말고 돌아보았다.
“그만 둬.”
“이것만요.”
연화는 칼을 놓고 솥뚜껑을 들었다. 안에는 아직 쌀이 없었다. 씻은 쌀은 복임의 손 아래 함지에 있었다. 연화는 빈 솥을 보고 있다가 뚜껑을 덮었다.
“물이라도 길어 올게요.”
“물도 있어.”
복임은 쌀 씻는 손을 멈추고 연화를 보았다.
“내가 못 할 것 같니.”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못 할 사람은 자기였다.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목에서 숨만 나왔다. 부엌의 익숙한 냄새가 갑자기 너무 짙었다. 젖은 재와 무, 아침에 끓인 국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정숙이 들어와 칼을 도마 끝에서 안쪽으로 밀었다.
“오늘은 못 하겠어요.”
연화가 말했다.
복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숙은 연화에게 먼저 나가자고 하고, 부엌 문턱에서 기다렸다.
방으로 돌아와 앉자 앞치마 끈이 허리를 세게 눌렀다. 풀려고 등 뒤로 손을 돌렸으나 매듭을 찾지 못했다. 정숙이 뒤로 와서 풀어 주었다. 연화는 앞치마를 받아 무릎 위에 뭉쳤다.
“이월에도 저는 편지를 기다렸어요.”
정숙은 연화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삼월에도요.”
문밖으로 발소리가 지나갔다. 저녁을 먹을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연화는 누가 왔는지 목소리로 알아듣는 자신이 싫었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태준은 죽어 있었다.
정숙이 물을 가져다주었다. 연화는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았으나 입에 대지 못했다. 손이 떨려 물이 가장자리에서 조금씩 흔들렸다. 정숙이 그릇 밑을 받쳐 주자 그제야 한 모금 삼켰다. 목을 지날 때 아팠다.
어두워진 방에서 정숙이 등잔을 켰다. 불이 붙자 새로 받은 종이들이 먼저 보였다. 연화는 태준의 옛 편지와 공책을 한쪽으로 옮기고, 천량의 편지와 번역문은 펴 둔 채 두었다. 함께 넣으면 다음에 어느 것을 먼저 만지게 될지 두려웠다.
“저 사람은 얼굴이 어땠을까요.”
연화가 말했다. 정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아는 얼굴이었을까요.”
묻고 나서 연화는 눈을 감았다. 떠나던 새벽의 얼굴을 보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자기 방에 누웠던 태준의 어깨가 생각났다. 팔을 빼려다 연화의 머리카락을 눌러 둘이 몸을 일으켰던 일, 아프다고 하자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이불 위에 펴 놓던 손바닥이 떠올랐다. 그 손을 다시 자기 쪽으로 당긴 것은 연화였다.
연화는 무릎의 앞치마를 폈다. 거기에 얼굴을 묻으려다 음식 냄새 때문에 옆으로 밀었다. 정숙이 내민 천을 받기 전에 눈물이 턱에서 떨어졌다. 숨을 들이쉬면 소리가 났다. 멈추려고 입을 다물자 코로도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정숙이 등을 쓸었다. 연화는 몸을 피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왜 가겠다고 했느냐고 태준에게 묻고 싶었다. 돌아오려고 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연화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망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 더 싫었다.
한참 뒤 연화는 얼굴을 닦고 젖은 천을 접었다.
“아주머니, 아직 가지 마세요.”
“여기 있을게.”
정숙은 문 쪽에 두었던 방석을 끌어다 연화 곁에 놓았다. 연화는 앞치마를 무릎에서 내려 두 사람 사이에 밀어 놓고, 정숙이 앉는 쪽으로 발을 조금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