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성은 상을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연화는 그가 놓은 자리에 앉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안을 들여다보면 등만 보일 자리였다.
“여기 앉힐 겁니까?”
“어디든 괜찮습니다.”
태성이 상을 도로 당기려 했다. 연화는 손바닥으로 상판을 눌렀다.
“그냥 둬요. 내가 여기 앉으면 되지.”
태성은 가방에서 종이 묶음을 꺼냈다. 매듭을 풀다가 손을 바꾸었다. 연화가 가위를 가져오려 하자 자를 것은 아니라고 했다. 두 번째 손가락은 잘 구부러지지 않는 듯 곧게 남아 있었다.
지난해 십이월 태성이 돌아왔을 때, 그는 서른아홉이라고 했다. 정숙은 아들이 신을 벗기도 전에 손을 잡았고, 태성은 한쪽 발만 맨발인 채 문간에 서 있었다. 태성은 몇 숟가락 먹고 내려놓은 뒤 속이 아직 따라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숙은 그릇을 치우지 않고 아들 앞에 두었다.
지금 태성은 풀어낸 끈을 상 옆에 감아 놓았다. 연화는 나아졌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조태섭은 어떻게 찾았어요?”
“예전에 종이를 거래하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서울에 있다는 건 지난달에 알았고요. 찾아가서 두 번 만났습니다.”
“그때 물어보지.”
“물었습니다. 오늘 다시 이야기하겠다고 했어요.”
태성은 접힌 종이를 폈다. 천구백삼십이 년 구월 이십사일이라는 날짜가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조태섭을 만나 적은 것이라고 했다.
“이걸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중국에서 올 때 가져와 어머니 옷궤에 두었습니다. 일본에 끌려간 동안에도 거기 있었어요.”
연화는 종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 태준의 물건을 전하러 왔던 태성의 가방이 생각났다.
정숙이 안방에서 나왔다. 장에 갈 때 드는 바구니를 팔에 걸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 안 보겠다.”
“어머니가 안 계셔도 물을 것은 묻겠습니다.”
“네 아버지가 북으로 갈 날짜를 알고 있었는지 물어라. 모르면 모른다는 말까지 듣고.”
연화는 곁에 자리를 만들려고 방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주머니, 다녀오시면 말씀드릴게요.”
“네가 들은 것만 말해라. 나 안심시키려고 보태지 말고.”
태성이 따라 나서려 하자 정숙은 혼자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옥분은 오후에 쓸 채소를 다듬어 놓고 자기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연화가 그러라고 하자 문간에서 돌아보았다.
“저 없을 때 손님 받으려 하지 마세요. 솥도 내려놨어요.”
“알았어.”
“알았다고 하고 자꾸 받아요.”
연화는 문에 쉬는 중이라고 쓴 종이를 붙였다. 태성은 종이를 두 묶음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태준이 남긴 것이고, 하나는 자신이 적은 것이라고 했다.
조태섭은 약속한 시각보다 조금 늦게 왔다. 문밖에서 종이를 읽은 뒤 연화를 보았다.
“문연화 씨요?”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섭은 모자를 벗어 들었다. 귀 위의 머리가 희었고 코 옆에는 땀에 젖은 자국이 나 있었다. 길에서 스쳤으면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인지부터 보았을 것이다.
태성은 안쪽 자리를 가리켰다.
“가게를 쉬게 해서 미안하오.”
“제가 오시라고 했습니다.”
연화는 물을 세 잔 가져왔다.
“선생 부인은 안 계십니까.”
“오늘은 안 만나겠다고 하셨습니다.”
태성은 펼쳐 둔 종이를 돌렸다.
“그때 쓴 것까지 있구먼.”
“아버지하고 구월에 만났을 때입니다. 서씨에게 아버지와 태준 씨 이름, 제본소 위치를 알려 주었다고 하셨지요.”
“그건 그때도 말했소.”
“일본 쪽에 알렸는지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섭이 물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자리에 둥근 물기가 남았다. 연화는 닦을 것을 찾지 않고 그의 손을 보았다.
“그때는 말을 할 수가 없었지.”
“오늘은 하시겠습니까.”
태섭은 태성을 보다가 연화 쪽으로 눈을 옮겼다.
“이분도 다 아시오?”
“몰라서 여기 앉았어요.”
준비한 말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서씨가 북쪽에서 왔다는 말을 내가 곧이들었소. 그렇지만 그 일하고 별도로 만난 사람이 있었소.”
태성은 연필을 집었다.
“어느 쪽 사람이었습니까.”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 쪽 사람이오. 중국말을 해서 통역 없이 만났소.”
태성의 연필이 움직였다.
“내가 붙잡으러 다닌 것은 아니오. 종이에 있는 것을 옮겨 주었지.”
“무엇을 옮겼어요?”
연화가 물었다.
“이름하고, 찾는 곳하고.”
“누구 이름을요.”
“일본 영사관 경찰 쪽에 내가 적어 주었소. 태준이 이름하고 제본소 있는 데를. 한경애가 사람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도.”
태성은 적던 손을 멈추고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태섭은 삼십일 년 가을부터 이듬해 정월 사이였다고 했다. 두 번 적어 주었다는 말 뒤에는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연화는 한경애라는 이름을 다시 들었다. 태성이 아까 태준의 기록을 설명하면서 말했던 사람이었다. 글을 가르치던 곳을 바꾸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태준 씨가 편지를 꺼내기 전에 수사자가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성이 다른 묶음을 폈다.
“이 두 번 가운데 어느 때 건넨 것이 거기로 갔는지 아십니까.”
“그자들이 내게 와서 어디에 썼다고 말해 주겠소?”
“그건 모른다는 말씀이군요.”
태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은 그 대답도 적었다.
“돈도 받았습니까.”
태성이 물었다. 태섭은 물잔을 잡았다가 놓았다.
“내가 그때 무슨 형편이었는지 자네도 알지 않소.”
“얼마나 어려웠는지 묻는 게 아닙니다.”
“돈을 받았소. 그리고 내 이름은 잡아갈 사람들 틈에 넣지 않겠다고 했지.”
연필심이 조금 부서졌다. 태성은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밀고 다시 썼다.
“그 약속을 먼저 받고 적어 주었습니까.”
“처음에는 그쪽에서 그런 말을 했소. 다음에 갔을 때도 확인했고.”
“그때 붙잡혀서 맞았습니까?”
태성이 물었다.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었소.”
영옥이 돌아왔던 겨울, 소매 속에서 드러났던 손목이 떠올랐다. 그날 연화는 종이에 적힌 말을 먼저 믿고 영옥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그때도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오. 정보를 조금 주면 더는 우리 쪽을 건드리지 않을 줄 알았지.”
“우리 쪽이 누구예요?”
연화가 물었다.
“나하고 내 식구들 말이오.”
“태준이도 거기 들어 있었어요?”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태준을 잡아가라고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찾아갈 집은 적어 주셨잖아요.”
“그 집이 곧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소.”
“그런데 당신 집은 안 찾아오게 약속을 받았고요.”
연화는 물잔을 들었다. 물이 턱에 조금 흘렀다. 태섭이 손수건을 꺼내려 하자 괜찮다고 했다.
태성은 앞에서 들은 말을 다시 읽었다. 일본 경찰 쪽에 이름과 장소를 적어 주었고 돈을 받았으며, 자신을 체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태섭은 그 약속이 지켜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했다.
“지켜진다고 믿고 받으신 겁니까?”
“그렇지. 안 그러면 내가 왜…….”
태성은 기다리다가 방금 대답한 데까지만 적었다.
연화는 그 사람이 한 번만 더 자기 형편을 말하면 일어나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떠나면 물어볼 수 없는 말이 남았다.
“그 종이 때문에 태준이가 경성에 못 온 거예요?”
“전투가 난 것을 나한테 묻는 거요?”
“전투 말고요. 그전에 돌아오려고 했어요. 일을 받고 돈을 모으고 있었어요.”
돌아와 길을 잘못 들거나, 여관이 아닌 밥집 문 앞에서 자기를 찾는 모습은 여러 번 생각했었다. 태섭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성은 태준이 습격 뒤 사람들에게 경고하러 다녔고 그 일에 여비를 썼다고 기록에 남겼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다친 경위는 천량의 편지로 알았으며,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주소를 주신 일이 그 뒤의 일에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주소를 주신 일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도운 일은 왜 아무도 말하지 않소.”
그는 톈진에서 쌀을 구했던 일과 식사를 사고 종이 꾸러미를 날랐던 일을 말했다. 태성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연화는 태성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 쌀 먹었습니다.”
태성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때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 여기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다시 물으러 간 겁니다.”
태섭이 태성의 팔 쪽으로 손을 뻗었다. 태성이 종이를 당기자 손은 상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이 사람이 말을 계속하는 동안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일이 어려웠다.
태성이 아버지의 북행 이야기를 꺼냈다. 태섭은 정헌이 북쪽 사람들과 연락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출발 날짜는 몰랐다고 했다. 그 일에 관하여 일본 쪽에 전한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없다고 대답했다.
“서른두 해 구월에는 아버지께 일본 쪽 일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모른다고 하시는 것을 제가 그대로 믿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태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연화는 그가 누르고 있는 날짜를 보았다. 정헌이 살아 있던 날이었다.
“없으면 없다고 하는 거지, 무슨 말을 더 하오.”
태섭도 목소리를 높였다.
태성은 상에서 손을 내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화는 그의 무릎 가까이 떨어진 연필을 주워 상에 놓았다.
“아버지가 붙잡히던 데 저는 없었습니다. 누가 어떤 말을 주었는지도 다 못 알아냈습니다. 오늘 한 대답은 오늘 들은 것으로 적겠습니다.”
태섭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화는 그가 안도했는지 지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내가 이제 가도 되겠소?”
“적은 것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다른 데가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길게 쓰지 못한 말은 여백에 보탰다. 굽혀지지 않는 손가락이 종이를 밀어 한 번 돌아갔다. 연화는 상 반대편 끝을 잡아 주었다.
태성이 읽는 동안 태섭은 두 군데를 고쳤다. 돈을 받으러 간 횟수와 주소를 적어 준 횟수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태성은 그 구별을 넣었다. 일본 경찰 쪽이라는 말, 돈을 받았다는 말, 자기 체포를 면하겠다는 약속을 들었다는 말에는 고치라는 요구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라고 준 건 아니라는 말도 넣으시오.”
태성은 그것도 태섭이 한 말로 적어 읽었다. 그 말을 써 준다고 자기가 동의한 것이 되는지 묻고 싶었다. 태성이 종이의 첫머리를 다시 보여 주었다. 오늘 조태섭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어디에 낼 거요?”
“아직 정한 데는 없습니다. 오늘 한 말을 들고 어디에 가서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알아볼 겁니다.”
“받아 줄 데도 없이 이러는 거요?”
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태섭에게 종이를 더 가까이 밀었다.
“받아 줄 데가 정해져야 하실 말이에요?”
태섭은 입을 다물고 종이를 읽었다. 태성이 직접 읽겠느냐고 물었고, 태섭은 다 보았다고 했다.
태섭은 읽은 종이 아래에 조태섭이라고 썼다. 태섭이 연필을 내려놓고 나서야 태성이 자기 쪽으로 돌렸다.
이름 석 자 아래에서 모든 일이 끝나기를 바랐던 마음이 있었는지, 서명 뒤에도 태섭이 눈앞에 앉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태섭은 일어나며 모자를 집었다. 정숙에게 자기가 다녀갔다고 전해 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태성이 어머니가 알고 계신다고 하자 고개만 끄덕였다. 연화에게도 몸을 숙였다. 연화는 답례하지 못했다.
연화는 태섭이 마신 잔을 집었다가 다시 놓았다. 잔 밑의 물기는 말라 가장자리만 남아 있었다.
“제가 쓴 이름도 적어 줘요.”
연화가 말했다.
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이름 말입니까.”
“경찰한테 적어 준 것.”
태성은 새 종이를 꺼냈다. 연화는 상 모서리에 붙은 연필 가루를 손끝으로 모았다.
“천구백삼십 년에 남기수가 와서 또 오게 하지 말라며 쓰라고 했어요. 나는 윤태준 이름을 썼고, 주소는 그 사람이 베꼈어요.”
태성은 적고 나서 그날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 물었다. 연화는 정숙과 복임이 있었던 곳을 기억나는 대로 말했다. 자기가 방 밖에 서 있다가 책을 가져왔다는 것, 편지와 책은 돌려받았다는 것도 말했다. 그 종이가 상하이로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연화는 덧붙였다.
연화는 태준에게 경찰이 다녀간 날짜를 써 보냈고, 읽었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오늘 들은 말하고 섞지는 말아 줘요.”
“따로 두겠습니다.”
태성은 방금 적은 종이를 앞선 기록 옆에 놓았다. 연화는 두 장 사이를 보았다. 자기가 손가락을 펴지 못하게 붙잡힌 것은 아니었고, 태섭도 자기처럼 경찰이 기다리는 여관 방에서 이름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 차이를 말하려고 하면 여전히 자기 이름 쓴 손부터 감추고 싶었다.
정숙이 돌아왔다. 바구니에서 대파 잎이 비어져 나와 문설주에 쓸렸다. 연화가 받아 들자 정숙은 빈 자리를 보았다.
“갔니.”
태성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정숙은 상 앞에 앉아 먼저 무슨 말을 했는지 들려 달라고 했다.
태성은 일본 경찰 쪽에 이름과 장소를 적어 주고 돈과 불체포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는 대목부터 말했다. 정숙은 중간에 묻지 않았다. 태성이 북행 날짜에 관한 대답까지 전한 뒤에야 손바닥을 무릎 위로 돌렸다.
“네 아버지 일은 아직 모르는 거구나.”
“아버지의 북행 날짜를 누가 넘겼는지는 오늘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정숙은 고개를 숙였다. 연화는 바구니에서 손을 뺐다. 대파 뿌리의 흙이 치마 위에 떨어져 있었다. 털지 않고 앉았다.
잠시 뒤 정숙이 아들에게 종이를 읽어 달라고 했다. 연화는 자기 앞에 있는 새 종이를 당겼다. 태성은 먼저 읽어 본 뒤 고칠 곳을 말해 달라고 했다. 연화는 눈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자기가 하지 않은 말은 없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쓰려니 그날 남기수가 내밀던 종이와 오늘의 종이가 잠깐 겹쳐 보였다.
연화는 연필을 상에 놓고 한 번 손을 폈다. 태성은 재촉하지 않았다. 정숙도 물잔을 당겨 놓고 기다렸다.
“이 일 물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도 오라고 해요. 아주머니한테만 가지 말고.”
연화는 새 종이에 밥집 주소를 쓰고 그 아래에 문연화라고 적었다. 글씨가 비좁아 마지막 획은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종이를 돌려 태성에게 주었다.
“소리 내서 한 번 읽어 줘요.”
태성은 연화가 쓴 주소부터 읽었다. 바깥에서 손님이 쉬는 중이냐고 물었다. 연화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대답하고 다시 상 쪽으로 앉았다. 태성이 제 이름까지 읽은 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연화는 상 끝에 눌러 두었던 손을 떼고, 잘 들리지 않은 낱말 하나를 다시 읽어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