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은 문턱을 넘으면서 봉투가 있느냐고 물었다. 머리 위에 얹고 온 수건도 벗지 않은 채였다. 연화가 어느 크기냐고 되묻자 정숙은 손바닥을 벌렸다가 도로 오므렸다.
“태성이한테 보낼 것.”
아들은 아직 규슈의 탄광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연화는 선반 위 종이 꾸러미를 내렸다. 깨끗한 것을 골라 주는데 정숙이 말했다.
“일본이 졌단다.”
연화는 봉투를 놓지 못했다. 정숙의 손가락과 자기 손가락 사이에서 종이가 조금 휘었다.
“누가 그래요?”
“쌀집에서 방송을 듣고 나와 그러더라. 이제 우리나라가 풀려났다고.”
옥분이 아궁이 앞에서 일어섰다. 옥분은 부엌 밖을 보더니, 방금 정숙이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연화는 봉투를 놓고 뒤따랐다.
길 건너 지물전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심씨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기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해방이래요.”
옥분이 말했다. 바로 옆에서 들었는데도 연화는 옥분을 돌아보았다.
“우리 이제 일본 사람 나라 아니래요.”
정숙은 봉투를 들고 지물전으로 건너갔다. 연화는 가게 안에서 국이 끓어 넘치는 소리를 듣고 돌아왔다. 급히 뚜껑을 들다가 손을 데어 치마에 문질렀다.
옥분은 조금 뒤 돌아와 불을 줄였다. 둘 다 한동안 솥을 보고 서 있었다.
“해방이라고?”
“네.”
옥분의 입이 웃는 모양으로 벌어졌다. 연화도 따라 웃었다.
정숙은 심씨와 함께 돌아왔다. 태성의 편지 겉봉을 가져오면 일본으로 보낼 길을 알 수 있겠느냐고 묻는 중이었다.
“우편국에 물어야겠지요. 저도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럼 편지는 써 놓아야겠네.”
심씨가 이제 곧 아드님도 오겠다고 하자 정숙은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다.
“그야…… 배를 타면.”
“어느 배가 오는지 알아요?”
“그것은 아직.”
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라는 말부터 써 놓고 길은 따로 알아보겠다고 했다.
점심 손님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국부터 달라고 했다. 연화가 국그릇을 놓자 그는 오늘 같은 날에도 배가 고프다며 웃었다. 밥을 먼저 먹어야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지 않겠느냐고 했다.
연화는 웃다가 자기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서서 두 숟가락을 먹는데 옥분이 앞치마 끈을 풀었다.
“저 나갔다 올래요.”
“어디?”
“사람들 있는 데요.”
옥분은 끈을 완전히 풀지 않고 연화를 보았다. 열네 살에 와서 처음 국을 끓이던 아이는 이제 스물다섯이었다. 연화는 저녁에 쓸 채소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해 지기 전에는 와. 저녁에 사람이 더 올지 모르니까.”
옥분은 앞치마를 두 손으로 잡았다.
“오늘 저녁에도 해야 해요?”
“먹으러 오면 줘야지.”
“저도 오늘 나가 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 다 나간 뒤 말고요.”
손님 하나가 밥값을 놓으며 오늘은 주인장도 쉬라고 했다. 연화는 그 돈을 집어 들었다. 남은 밥이며 채소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 물건을 들일 돈도 필요했다.
연화가 혼자 남겠다고 하면 옥분은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내고 나면 자신은 저녁 내내 소리가 나는 쪽을 보면서 그릇을 씻을 것 같았다.
“두 분 나가시면 닫자.”
“정말요?”
“불은 꺼야 해. 다녀와서 솥까지 닦을 일 만들지 말고.”
둘은 남은 밥을 옮겨 담고 국을 아궁이에서 내렸다. 마지막 손님이 문턱에서 신을 신는 동안 연화는 오늘 영업을 마쳤다고 종이에 썼다. 붙이려고 밖으로 나가니 옥분이 이미 머리를 다시 빗고 있었다.
“내 것은?”
연화가 빗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옥분은 빗살에 낀 머리카락을 빼고 건넸다.
정숙도 함께 나왔다. 연화가 큰길까지 걸어도 괜찮겠느냐고 묻자 정숙은 다리가 아프면 자기가 말하겠다고 했다. 셋은 가게 문을 닫아 걸고 나섰다.
골목 입구에서는 아이가 흰 천에 그려진 태극을 말리고 있었다. 검은 획 하나가 번져 아이의 엄지에도 묻어 있었다. 지나가던 사내가 천을 들어 보려 하자 아이는 아직 안 말랐다고 소리쳤다. 옥분도 웃으며 그 옆을 지났다.
큰길에서는 사람들이 한쪽으로 갔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섞였다. 누군가 만세를 부르면 가까운 사람들이 받아 불렀다. 연화는 입을 열었으나 처음에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옥분이 연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못 들었어요.”
“누가 너 들으라고 했니.”
말을 하고 나서 연화는 웃었다. 이번에는 팔을 들었다. 옆 사람의 어깨에 손등이 닿아 미안하다고 하려는데, 그 사람이 먼저 만세를 불렀다. 연화도 소리를 냈다. 목 안쪽이 벌어지고 배에 힘이 들어갔다. 옥분은 두 팔을 올린 채 옆으로 몇 걸음 뛰었다.
정숙은 팔 하나를 어깨 높이까지만 들었다. 정숙이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연화도 다시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
길가에서 쉬는 동안 목이 따끔거렸다. 정숙은 건물 벽에 등을 대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옥분은 어느 쪽으로 더 가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지 물으러 갔다.
연화는 지나가는 얼굴들을 보았다. 태준은 저 사람들 사이에 없었다.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서 이 소리를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고,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이 그 뒤를 따라왔다. 목이 아파 침을 삼켰다.
“태성이도 저렇게 소리 지르면 좋겠구나.”
정숙이 말했다.
정숙은 길 한가운데서 웃는 젊은 사내를 보고 있었다.
“거기서도 알겠죠.”
“알아도 내가 써야지. 여기서는 우리가 이러고 있었다고.”
옥분은 더 가 보겠다고 했다. 연화는 이번에는 돌아올 시각을 정하지 않았다. 대신 집에 가기 전에 가게에 들르라고 했다. 남은 음식을 나누어 가져가야 했다. 옥분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가 돌아와 연화의 팔을 잡았다.
“아까 저 소리 지르는 거 봤어요?”
“봤어. 넘어질 뻔한 것도.”
“그건 보지 말지.”
연화는 정숙과 나란히 골목으로 돌아왔다. 가게 앞에 붙인 종이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연화는 그것을 누르다가 손을 멈췄다. 어차피 오늘은 다시 열지 않을 문이었다.
해 질 무렵 영선이 자기 일터에서 돌아와 밥집에 들렀다. 연화는 부엌 바닥에 앉아 오이를 씹었다. 영선은 닫힌 가게 안에 연화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놀고 왔지.”
연화가 말했다. 말하고 보니 좀 쑥스러웠다. 영선은 그럼 자기도 앉겠다고 하고 신을 벗었다.
정숙이 쓰던 편지를 들고 나왔다. 정숙은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두 번 썼는데 하나를 지워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냥 두세요.”
연화가 말했다.
“같은 말을 또 썼잖니.”
영선은 편지를 받아 보지 않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두 번 말하고 싶은 거야?”
정숙은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그렇다고 했다. 지우지 않았다.
십육일에는 아침부터 손님이 들었다. 연화는 밥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려고 자꾸 솥을 열었다. 옥분은 김이 나간다고 한마디 하고는 뚜껑 위에 마른 천을 얹었다.
문밖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들어왔다. 누가 돌아왔다는 말, 어디에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 이제 무엇이 달라질 거라는 말이었다. 돌아왔다는 사람 가운데 태성은 없었다. 정숙은 편지를 품고 나갔다가 오후 늦게 돌아왔다. 아직 어느 길로 보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봉투는 붙이지 않은 채였다.
영옥은 저녁 준비가 시작되기 전에 왔다. 손에 얇은 책 두 권을 들고 있었다.
“다시 읽어도 되겠지요?”
영옥은 연화에게 물었다. 연화는 무슨 뜻인지 알고도 책부터 보았다.
“무엇을 읽으려고?”
“가져온 것부터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도요.”
옥분이 책 한 권을 폈다.
“언제요?”
“손님 없는 날에 모이면 어떨까 했어요.”
영옥이 대답했다. 옥분은 책을 덮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늘 못 해요.”
“다들 일하는데 한창 바쁠 때 모일 수는 없잖아요.”
“손님 없으면 내일 먹일 것 준비하고, 그거 끝나면 장에 가고요. 없는 날이 언제인지 미리 알 수도 없어요.”
옥분의 말이 자기한테 하는 말로 들렸다.
“장사를 안 할 수는 없잖니.”
“어제는 했잖아요. 안 하는 거.”
“어제하고 날마다가 같아?”
“날마다 하자는 말 아니에요.”
옥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영옥이 책을 자기 쪽으로 당기려 하자 옥분은 손끝으로 책장을 눌렀다.
“이거 보겠다고 왔는데 왜 다시 가져가요.”
영옥이 손을 멈췄다.
“가져가려는 게 아니라 젖을까 봐.”
상 위에 파 씻은 물이 튀어 있었다. 옥분은 그제야 책 밑을 보고 마른 천을 가져왔다. 바깥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느냐는 소리가 났다. 연화가 된다고 대답하자 옥분은 책을 벽 쪽으로 밀고 상을 폈다.
저녁 손님이 나간 뒤에도 영옥은 남아 있었다. 연화는 부엌에서 솥을 닦다가 영옥에게 내일도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올 수 있어요.”
“내일 저녁 장사 한 번 쉬어 보자. 읽는 게 얼마나 걸릴지 나도 모르겠으니.”
옥분이 씻던 그릇을 물 위로 들었다.
“언니도 앉아요?”
“여기 있는데 어디를 가.”
“부엌에 있는 거 말고요.”
연화는 솥 안을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손님이 없으면 그동안 못 한 일을 할 생각을 벌써 하고 있었다.
“앉을게.”
영옥이 내일 한 번 해 보고 불편한 것을 고치자고 했다. 옥분은 방 안에 상을 몇 개나 펼 수 있는지 보러 갔다.
십칠일 오후, 연화는 평소보다 밥을 적게 안쳤다. 쌀을 한 줌 더 넣으려다가 다시 쌀독에 돌려놓았다.
문에 붙인 종이를 보고 들어온 단골은 밥만 조금 주면 되는데 왜 쉬느냐고 했다. 연화는 읽을 것이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인장이야 글 알잖소.”
“안다고 다 읽은 건 아니니까요.”
그는 웃으며 점심을 먹고 갔다. 내일부터는 다시 여느 때처럼 밥을 하느냐는 것은 나가면서 물었다. 연화는 그렇다고 했다. 종이의 떨어진 모서리를 풀로 붙이고 들어왔다.
영옥은 낮에 이야기를 들은 이웃 배씨와 함께 왔다. 빨래 품을 파는 배씨는 손톱 가장자리가 하얗게 불어 있었다. 손을 오래 물에 담가 글씨를 쓰면 종이가 젖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옥분이 마른 수건을 내주었다.
영선은 저녁 일을 마치고 오겠다며 먼저 연필 두 자루를 가져다 놓았다. 정숙은 등을 기댈 것이 있어야 오래 앉는다고 했다. 연화는 접은 이불을 벽에 세웠다.
자리를 다 만들고도 연화는 앉지 않았다. 물주전자를 들고 부엌으로 가려는데 옥분이 물었다.
“언니는 어디 앉아요?”
연화는 빈 곳을 보았다. 책을 가까이 둘 수 있는 자리는 이미 차 있었다.
“여기 좁게 앉으면 돼.”
옥분이 무릎을 옮겨 자리를 냈다. 연화는 물주전자를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방바닥에 두 발을 들이고 나니 부엌 문턱이 평소보다 멀어 보였다.
영옥은 책을 펴기 전에 무엇을 읽고 싶은지 물었다. 배씨는 글자 몇 개를 안다면서 자기 이름도 가끔 획이 빠진다고 했다. 옥분은 긴 것을 읽으면 앞에 나온 사람이 누구였는지 잊는다고 했다.
“그럼 다시 앞을 보면 되지요.”
“읽을 때마다 그러면 언제 끝나요?”
“저도 앞을 봐요.”
영옥이 실제로 몇 장을 넘겨 보였다. 옥분은 책 위에 손을 놓은 채 웃었다. 연화도 웃었지만 자기도 그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영옥이 읽었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이 주막에서 잠자리를 얻는 대목이었다. 배씨가 밥도 안 먹고 자느냐고 물었다. 영옥은 아직 다음 줄을 안 읽었다고 했다. 다음 줄에 밥을 청하는 말이 나오자 배씨가 그럴 줄 알았다며 무릎을 쳤다.
옥분이 이어 읽었다. 한 낱말에서 두 번 멎었다. 영옥이 입을 열려는데 옥분은 손바닥을 조금 들었다. 영옥은 기다렸다. 옥분은 앞의 말부터 다시 읽어 끝내 그 줄을 지나갔다.
문밖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가 났다. 연화의 무릎이 먼저 들렸다. 늦게 온 영선이 부엌에서 컵을 꺼내고 있었다.
“내 것만 가져갈게요.”
영선이 말하자 연화는 다시 앉았다. 영선은 정숙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까지 읽었느냐고 묻고는, 처음부터 해 주려는 영옥에게 들으면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책 한 대목을 다 읽은 뒤에는 종이를 나누었다. 영옥은 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나 오늘 본 것을 써 보자고 했다. 정숙은 새 종이 대신 품에서 아들에게 쓰던 편지를 꺼냈다. 같이 있어도 자기 편지를 써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요.”
영옥이 대답했다.
연화는 받은 종이를 앞에 놓았다. 누구에게 쓸 것인지 정해지지 않으니 첫 줄의 어느 자리에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옥분의 연필이 옆에서 사각거렸다.
연화는 날짜부터 썼다. 십칠일이라고 적고 나서 그 위에 십오일의 일을 썼다.
십오일에 가게 문을 닫고 밖에 나갔다. 정숙 아주머니하고 옥분이하고 갔다. 나는 만세를 불러서 목이 아팠다.
그 아래에 태준의 이름을 적었다. 태준에게 해방을 알리는 편지가 아니었다. 그가 돌아오라고 쓸 수도 없었다. 연화는 이름 뒤에 짧게 말을 이었다.
태준이가 생각났다.
옥분이 몸을 움직이자 연화는 종이를 조금 당겼다. 옥분은 다리가 저리다고 중얼거리며 한쪽 다리를 뻗어 종아리를 주물렀다. 연화는 괜히 종이를 가린 것이 민망해 손을 내려놓았다.
정숙이 영옥에게 글자 하나를 물었다. 영옥은 어머니가 쓴 줄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대답했다. 배씨는 이름을 다 썼다며 종이를 들어 보였다.
“언니는 뭐 썼어요?”
옥분이 물었다.
연화는 처음 세 문장을 읽었다. 목이 아팠다는 데서 옥분이 웃었다.
“저도 아직 아파요. 아침에 손님 부르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서.”
“그래도 그렇게 소리를 질렀니.”
“언니도 했잖아요.”
연화는 그렇다고 했다. 태준의 이름이 있는 줄은 읽지 않았다. 옥분은 더 읽으라고 조르지 않고 자기 종이를 폈다. 거리에서 본 아이와 덜 마른 깃발 이야기를 썼는데, 천의 검은 물이 손가락에 묻었다는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묻고 싶다고 했다.
연화가 옥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옥분은 자기가 쓴 데까지 먼저 읽겠다고 했다. 연화는 기다렸다.
옥분이 마지막 줄을 읽고 나서 두 사람은 번졌다고 쓰면 되겠다고 의논했다. 연화는 자기 종이로 돌아와 한 줄을 보탰다.
오늘은 옥분이하고 나란히 앉아 글을 썼다.
연필을 놓으려는데 옥분이 팔꿈치로 연화를 가볍게 건드렸다.
“나도 있어요?”
“있어.”
연화는 종이를 돌려 마지막 줄을 보여 주었다. 옥분이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찾았다. 연화는 종이가 옥분 쪽으로 조금 더 가도록 손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