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 남의 말로 온 날짜

13장남의 말로 온 날짜

1932년 12월 7일~1933년 5월 12일, 경성 동래여관과 연화의 첫 밥집 · 문연화

우편배달부가 한정숙의 이름을 불렀을 때 연화는 밀가루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정숙은 빨랫감을 받으러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배달부가 내민 봉투에는 이태성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연화는 손가락 끝의 가루를 더 털고 받았다.

봉투를 부엌 선반에 놓으면 물이 튈 것 같았다. 연화는 빈 쟁반 위에 봉투를 올려 부엌 문간에 두었다. 수제비를 떼면서도 마당에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정숙은 점심때가 지나 돌아왔다. 바구니에서 젖은 옷을 꺼내기도 전에 쟁반의 봉투를 보았다.

“태성이 거니?”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구니를 받아 들었으나 정숙을 따라 방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잠시 뒤 정숙이 문을 열고 연화를 불렀다.

“영옥이 오면 이리 오라고 해라. 영선이도.”

“무슨 일이에요?”

정숙은 편지를 내밀지 않고 한 줄을 읽었다.

“아버지 사망 통지에는 십일월 십사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가 이십오일에 얼굴을 보고 아버지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연화는 문턱에 쪼그려 앉았다. 정숙이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도 글이 있었다. 끝까지 눈을 옮기고 나서 다시 앞면을 보았다.

“태성 씨가 지금 어디 있대요?”

“이것은 다롄에서 썼다. 상하이에 들러 맡긴 것을 찾고 오겠다고.”

정숙은 봉투 안을 벌려 보았다. 연화가 손을 내밀자 정숙은 봉투만 건넸다.

영옥이 먼저 돌아오자 정숙은 작은딸을 곁에 앉혀 편지를 읽게 했다. 읽는 동안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빠가 봤대?”

“그렇게 썼다.”

“아버지를?”

정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옥은 종이를 낮췄다. 연화는 흙 묻은 영옥의 치마에 손을 뻗었다가 그만두었다.

영선은 일하는 식당의 저녁 준비를 마치고 왔다. 영옥이 언니에게 편지를 건넸다. 영선은 선 채 읽다가 방문을 짚었다. 연화는 문간을 비웠다.

한참 뒤 영선이 다시 신을 신었다.

“어딜 가니?”

정숙이 물었다.

“내일 아침에 한 시간 늦게 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올게.”

“그런 말 하러 또 나갈 것 없다. 아침 일은 누가 하고. 사정한다고 다 들어주겠니.”

영선은 신 뒤축을 세우던 손을 멈췄다.

“싫다는 말도 아직 안 들었는데 엄마가 왜 먼저 안 된대?”

“네가 벌어 오는 돈 없으면 다음 달은 어쩌려고.”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잖아. 나는 내일 아침 엄마하고 있고 싶어.”

영선은 신을 다 신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연화는 저녁 쌀을 씻어야 했다. 그런데 일어나면 영선이 하던 말도 끝나 버릴 것 같아 무릎만 조금 옮겼다.

“저녁 설거지를 더 하겠다고 물을 거야. 그것도 내가 가서 말하면 안 돼?”

정숙이 편지를 접었다.

“다녀와라.”

정숙이 찬바람 드는데 목에 무엇이라도 두르고 가라고 했다. 영선은 자기 옷보퉁이에서 수건을 꺼내 둘렀다.

연화가 부엌으로 돌아오자 복임이 불린 쌀을 솥에 붓고 있었다. 연화는 빈 함지를 받아 씻으며 손등에 말라붙은 밀가루도 문질러 벗겼다.

그날 밤 영선은 늦게 가도 된다는 대답을 받아 왔다. 대신 저녁에 남아 하기로 한 일을 정숙에게 말했다. 정숙은 딸이 목에서 푼 수건을 받아 접었다. 영선은 어머니 옆에 앉아 수건 끝을 다시 폈다. 둘의 손이 그 위에 나란히 놓였다.

십이월 십구일 오후, 태성이 여관에 왔다.

연화는 가방을 들어 올리는 사내를 알아보지 못했다. 태성은 편지로 알던 이름이었고, 떠올리던 얼굴은 실제보다 어렸다. 정숙이 부엌에서 나와 아들을 부르자 연화도 그제야 바가지를 내려놓았다.

태성이 인사하려고 허리를 숙였는데 정숙이 옷깃부터 잡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먼저 들어와.”

정숙은 아들의 어깨와 등을 번갈아 만졌다. 태성은 신을 벗다가 균형을 잃어 문설주를 짚었다. 영옥이 가방을 들고 먼저 들어갔다.

저녁 일을 마치고 정숙의 방에 가니 태성이 종이를 펴 놓고 있었다. 영선은 일을 일찍 마치지 못해 아직 오지 않았다. 정숙은 연화에게 문을 닫아 달라고 했다.

태성은 통지에 적힌 일본 글을 조선말로 옮겨 읽었다. 병으로 죽었다는 말이 나왔다. 정숙이 종이를 눌렀다.

“너도 그렇게 알고 왔니?”

“그건 저들이 적은 말입니다.”

“몸은 어떻더냐.”

“얼굴하고 손에 멍이 있었습니다. 손도 많이 부어 있었고요.”

정숙의 손가락이 종이에서 떨어졌다.

“누가 때렸는지는?”

“제가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의원은 왔다 갔대?”

“그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태성이 두 손을 맞잡았다. 손등의 살갗이 터져 있었다.

“저는 아버지 계시던 방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몸을 확인하라고 데려간 곳에서 뵈었습니다.”

정숙은 한동안 아들의 손만 보았다. 영옥이 다른 종이를 당겼다. 태성은 아버지를 모신 곳을 적은 것이라고 했다. 다롄에서 정헌을 안내했던 인쇄공 장씨가 함께 가 주었다고 말했다.

“장씨라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했니.”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편지를 보내야겠구나.”

태성은 주소를 적어 두었다며 가방을 열었다. 주소를 찾다가 나온 종이 꾸러미에는 정헌의 모자가 있었다.

정숙이 모자 안쪽을 펴자 땀받이가 떨어져 있었다. 벌어진 데를 손가락으로 모았다가 놓았다. 영옥이 다른 옷은 없느냐고 물었다. 태성은 돌려받은 것은 이것뿐이라고 했다.

“아버지 편지는 받으셨지요. 십일월 삼일에 쓰신 것.”

“지난달 십육일에 왔다. 너희한테도 한 장씩 써 보냈잖니.”

영옥은 자기 앞으로 온 것은 따로 두었다고 했다. 정숙은 옷보퉁이에서 봉투를 꺼냈다. 연화는 그 편지가 왔던 날 정숙이 남편의 기침 이야기를 하던 것을 기억했다. 겨울옷을 더 보내야 하나 의논했었다.

“그 편지 보고 답장을 썼는데.”

태성은 어머니의 답장이 아버지에게 닿았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정숙은 봉투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편지를 고르게 밀었다.

영선이 돌아온 뒤에도 태성은 같은 대답을 해야 했다. 태성이 말을 마치자 영선이 누가 아버지를 잡아갔느냐고 물었다. 태성은 일본 경찰이 붙잡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체포된 뒤의 경위와 정보를 준 사람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정헌이 남긴 협의의 편지는 상하이 동료들에게 전했으나, 돌아가 다시 대답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도 했다.

정숙이 이제 그만하고 쉬자고 했다. 그러나 태성은 연화를 보았다.

“연화 씨께 가져온 것도 있습니다.”

연화는 가방 옆의 보퉁이를 보고 있었다. 정숙의 남편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그것이 태준의 것인지 생각했다. 태성이 먼저 말을 꺼내자 오히려 대답이 늦었다.

“제 방으로 가져가도 될까요.”

연화가 물었다. 정숙이 먼저 보퉁이를 태성 쪽으로 밀어 주었다.

태성은 상하이에서 맡아 두었던 태준의 물건을 다롄에 다녀온 뒤 찾아왔다고 했다. 연화의 방에 놓자 보퉁이가 생각보다 작았다. 연화는 이불을 밀어 앉을 자리를 냈다.

“여름에 원식 씨를 통해 보내신 답을 받았습니다. 직접 전할 수 있을 때까지 두어 달라고 하신 것, 아버지도 읽으셨습니다.”

“네. 제가 그렇게 썼어요.”

태성이 매듭을 풀었다. 연화는 기다렸다.

보자기 안에는 태준이 쓰던 송곳과 작은 가위가 있었다. 편지들은 따로 종이에 싸여 있었고, 돈주머니는 그 위에 놓였다. 가위 손잡이에 감긴 실밥이 눌려 납작해져 있었다.

연화는 가위를 손바닥에 놓았다. 경성에서 태준이 쓰던 가위와 같은 것인지 생각하려 했으나 크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태준의 손에 있을 때는 자기 손에 올려 볼 일이 없었다.

“이건 천량 씨가 가지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편지와 주머니는 태준 씨 옷에서 찾았고요.”

연화는 송곳 끝에 천을 다시 씌우고 가위도 내려놓았다.

태성이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돌아갈 여비로 남긴 돈하고 밀린 삯입니다. 여덟 원은 제본소에서 뒤에 받은 삯이고요.”

“중국 돈이지요?”

“예. 여기서 쓰시려면 바꾸셔야 합니다. 제가 알아보고 같이 가겠습니다.”

연화는 주머니를 받았다. 안에서 돈끼리 부딪쳤다. 태준이 어느 날 얼마씩 남겼는지는 물을 수 없었다. 태성도 그가 모으던 자리를 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남은 삯은 다 받은 거예요?”

“천량 씨가 받아 준 것은 여덟 원입니다. 그 이상 받아야 하는지는 저는 모릅니다.”

편지 묶음에는 자기가 보냈던 봉투도 있었다. 모서리에 손톱으로 눌러 붙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연화는 그것을 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안에 쓴 말을 태성도 읽었을까 싶었다.

“안에 있는 것까지 보셨어요?”

“아니요. 겉에 적힌 이름을 보고 나누어 두었습니다. 아버지도 안쪽은 펴지 않으셨습니다.”

연화는 편지를 제 쪽으로 당겼다. 아래에 문연화라고 적힌 봉투가 있었다. 풀칠하지 않은 귀가 조금 들려 있었다.

태성은 그 편지가 언제 쓰인 것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태준이 부치지 못한 것이 함께 있었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연화는 봉투 앞면에서 자기 이름의 마지막 획을 보았다. 태준은 화 자를 쓸 때 아래쪽을 길게 빼곤 했다. 연화는 손끝을 가까이 가져갔다가 종이 옆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안 열어 볼래요.”

태성은 기다렸다. 연화가 더 말하지 않자 보자기에서 손을 뗐다.

“이제 제가 둘게요.”

태성은 상하이에 돌아가 답할 일이 남아 오래 머물지 못하겠다고 했다. 연화는 물건을 옮겨 준 데 대해 고맙다고 했다. 태성은 문턱에서 고개를 숙였다.

연화는 도구를 천으로 말아 선반 안쪽에 넣고, 돈주머니는 옷보퉁이에 두었다. 편지 묶음은 태준이 남긴 갈색 공책 옆에 놓았다. 공책에 넣어 둔 옛 편지는 꺼내지 않았다.

연화는 새로 받은 봉투를 가장 위에 놓았다. 문연화라는 이름이 가려지지 않게 묶은 끈을 옆으로 밀었다. 눕고 나서도 봉투를 열지 않았다. 옆방에서는 영선과 태성이 낮게 말을 주고받았다. 정숙의 기침이 나면 말이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이듬해 일월 십일, 연화는 태성과 돈을 바꾸러 갔다. 연화는 일부만 꺼냈다. 돌아오는 길에 새 신을 한 켤레 샀다. 밑창이 벌어진 신으로 마당의 언 물을 밟으면 버선까지 젖었다. 가게 사내가 발끝을 눌러 보라고 하자 연화는 양발을 번갈아 들어 보았다.

여관에 와서는 새 신을 문 안에 두고 한동안 신지 않았다. 저녁 물을 버리러 나갈 때 옛 신을 찾다가, 새 신을 밖으로 돌려 놓았다. 뒤축이 단단해 손가락으로 벌려야 발이 들어갔다.

연화는 바꾼 돈에서 자기 방의 땔감 값도 냈다. 쓰고 남은 돈은 태준의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 돈을 쓴 날짜마다 사과하는 글을 쓰지도 못했다. 밤에는 발을 말리고 버선을 갈아 신었다. 다음 날 새벽에도 같은 신을 신었다.

태성은 일월 십육일 아침 상하이로 돌아가려고 여관을 나섰다. 정숙은 대문까지 따라갔다. 연화는 태성이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함께 서 있었다.

봄이 오자 연화는 가게를 보러 다녔다. 한번은 벽에 밴 기름 냄새만 맡고 나왔고, 한번은 솥을 걸 자리가 마음에 들어 뒤뜰까지 보았다가 물을 나를 거리가 너무 멀어 돌아섰다. 정숙이 함께 간 날에는 문턱에 서서 사람들을 세어 보기도 했다.

사월 이십칠일, 연화는 방 하나 딸린 작은 가게를 얻었다. 여관에서 모은 자기 저축에 은비녀와 놋대야를 판 돈을 보태 첫 세를 치렀다. 태준에게서 온 돈은 그 돈에 섞지 않았다.

복임에게는 오월 십일일까지 일하겠다고 말했다. 복임은 저녁 상을 닦다 말고 연화를 보았다.

“이미 얻어 놓고 말하는 거니?”

“네. 놓치면 또 못 얻을 것 같아서요.”

“여기 일은 누가 하고.”

연화는 젖은 행주를 접었다. 가게를 본 이야기는 했지만, 나가는 날을 말하는 것은 달랐다.

“그날까지는 제가 할게요. 새로 오는 사람이 있으면 솥 쓰는 것도 알려 주고요.”

복임은 상판에 붙은 밥알을 손톱으로 떼었다.

“솥이 다 똑같은 줄 알지 마라. 처음 며칠은 물을 잘 봐야 해.”

복임은 뒤늦게 가게가 어느 골목에 있느냐고 물었다. 연화가 길을 말하자 복임은 그쪽에는 점심때 사람이 몰린다고 했다.

오월 십이일 아침, 연화는 새 가게의 솥뚜껑을 두 번 열었다. 쌀 위로 작은 구멍들이 생기고 있었다. 정숙이 그만 닫으라고 했다.

“김이 다 나간다.”

연화가 뚜껑을 덮었다. 국자를 집으려다 찬장을 열었고, 행주를 찾다가 자기 어깨에서 꺼냈다. 정숙은 채소를 다듬으며 몇 번 웃었다.

“아주머니도 어디 두셨는지 모르면서.”

“내가 둔 건 안다.”

정숙이 칼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화는 정숙의 치마 밑에 반쯤 가린 칼자루를 가리켰다. 둘은 소리를 죽여 웃다가, 문밖에 사람이 서는 바람에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첫 손님은 밥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연화는 된다고 대답하고 상을 폈다. 그릇을 놓을 자리는 여관보다 넓었는데, 몸은 전처럼 옆으로 비켜 움직였다.

점심때에는 밥이 모자랐다. 연화는 기다리던 두 사람에게 새로 안친 밥은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나갔고 다른 사람은 반찬부터 달라고 했다. 연화는 나간 사람의 등을 보다가 솥 쪽으로 돌아섰다. 남은 숯을 고르고 부채질을 멈췄다.

영선은 자기 일터로 가는 길에 들러 빈 그릇을 옮겨 주었다. 연화가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되겠느냐고 하자 영선은 늦겠다고 했다. 연화는 그릇을 내려놓고 길을 비켜 주었다.

“저녁에 올게요.”

“너도 밥 먹고 와.”

연화는 혼자 남은 설거지를 보았다. 다음 솥이 뜸 드는 동안에는 저것부터 하면 되었다.

복임은 오후 늦게 왔다. 국을 먹고 물통을 가리키며 저 자리에 두면 밤마다 발로 찰 것이라고 했다. 연화가 벌써 한 번 찼다고 하자 복임이 혀를 찼다. 값을 치를 때 연화는 받지 않으려다가 내민 돈을 받았다. 복임은 잔돈도 받아 갔다.

저녁 손님이 뜸해졌을 때 영옥이 책을 품에 안고 왔다.

“밥상이 비면 여기서 읽어도 돼요? 방에서는 어머니가 주무셔서.”

“거기는 아직 젖었어. 이쪽으로 와.”

연화는 마른 상을 골라 내주었다. 영옥은 책을 내려놓고 옆에 세워 둔 물통부터 다른 자리로 옮겼다. 연화는 복임이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영옥이 책을 펴는 동안 문간에서 또 사람이 불렀다.

“주인장.”

연화는 문 쪽으로 갔다. 사내 둘이 서 있었다. 아직 밥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두 분 드실 건 있어요.”

연화는 앞치마의 느슨해진 끈을 당겨 묶었다. 영옥이 책을 든 채 일어나려 하자 앉아 있으라고 손짓하고, 벽에 기대 둔 상을 직접 내려 폈다.